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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和

김치볶음밥

재작년에 결혼한 아름이와 작년에 결혼한 현정이를 만났다.

주말부부인 아름이는 임신 6개월째, 현정이는 내년쯤 아이를 가질까 한단다.

8살,9살에 처음 만나 여드름난 시절을 함께 보냈고, 고물 스쿨버스를 같이 타고 다녔던 우리는

이제 아이 유모차와 베이비 시터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보니

아이는 36개월까지 엄마가 키워야한다고,

안정적인 정서발달에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요즘 <엄마 스킨십>이라는 책을 읽고 있노라는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내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말이야.

무의식 깊은 곳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엄마는 나를 보호해 줄거야' 같은

믿음이 별로 없는 것 같아. 할머니가 봐주시긴 했지만 나는 나와 내 동생이 맡겨진

낯선 곳에서 '얌전히 있어야지, 내 동생을 내가 지켜야지' 긴장했던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 있어.

그리고 민식이랑 포옹을 하면 말이야. 좋으면서도 그가 먼저 나를 밀치고

'이제 그만'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커. 내가 먼저 '이제 그만' 하고 싶은 욕구도 크고. 

불안정 애착이 있는 것 같아.  

자은이는 나와 성향이 다른걸 보니 그게 유아기적 성장과정과 얼마나 연관이 있는건진 모르겠지만

자은인 항상 내가 돌봐줬기 때문에 나와 좀 다르지 않을까 싶기도 해..

 

가볍게 꺼낸 것 처럼 말했지만

이건 사실 민식이와 요즘 가장 많이 이야기 나누는 주제였다.

그래서 핵심만 간단히! 말하고 싶은 내 의도와 다르게

변죽만 울리는 이 이야기를 왜 하고 있나, 싶었을 즈음

현정이가 말했다.

 

 

"맞아맞아, 나랑 자은이랑 같이 놀고 있으면 네가 '밥 먹어!' 했어.

그러면 우리는 얼른 들어와서 네가 차려준 밥을 먹었지, 맞아맞아"

 

나는 어른이 되버린 친구들 앞에서

여전히 어린아이인 나를 들춰내고서는

"내 안의 어린아이야, 그만 투정 부려라. 친구들 보기에 부끄럽다." 할 참이었다.

그런데 현정이는 오히려 밥을 차리던 어린아이에게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그 밥은 김치볶음밥이었다.

김치를 과도로 송강송강 썰다가 어느날은 가위로 쑹덩쑹덩 자르고 싶었지만

나는 엄마가 김치를 가위로 써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차마 용기내어 가위로 자르지 못했다.

어느 날은 과도가 답답해 가위로 숭강 잘랐다가

혹시 가위로 자른 김치는 나쁜 균이 묻는 것 아닐까 매우 걱정했고,

다음 번엔 다시 칼, 그리고 다시 귀찮아서 가위, 다시 걱정되서 칼을 사용하기를 반복했다.

집에는 참치 캔이 늘 있었다. (아니, 참치 캔이 있었을때만 김치볶음밥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확히 언제인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지금처럼 원터치 오픈형 참치 캔이 나오기 전부터 나는 참치 캔을 땄다. 그리고 볶고, 달걀을 풀고, 아주 눅눅한 김치볶음밥을 만들어냈었다.

 

현정이가 우리 집에 놀러오면 셋이서,

안오면 둘이서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세 접시에 나눠 담기도 했지만

그것마저 귀찮으면 그냥 김치를 볶았던 프라이팬 체 나눠 먹었다.

내가 만든 김치볶음밥이었으므로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런데

10살이 조금 넘었을 때부터 만들어 먹고, 먹였던 경력에 비추어

김치볶음밥 만드는 실력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첫 번째 의문점이고,

또 하나는,

가스레인지 앞에서 그 진 볶음밥을 볶고 있는 내 모습을

제 3자가 기억하는 이미지로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한 1m 40 쯤 되는 키에 머리는 포니테일로 묶고,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김치를 볶고 밥을 붓고 참치 캔을  따고

아주 진 볶음밥을 만들고 있다. 언제쯤 가스레인지 불을 꺼야하는지는 늘 고민이었다.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는 요란했다.

 

동생이나  친구를 불러들여 밥을 먹는 것은

귀찮은 일이기도 했지만 하기 싫은 일은 아니었고

맛 없다고 투정이면 속상했지만 뭐 어쩌겠냐 싶었다.

그러니까 늘 진 밥이었던 나의 김치볶음밥은 그저 먹고 먹이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10살이 조금 넘은 큰 딸이 먹는 일이었고 언니가 먹이는 일이었을 뿐이었다.

 

오늘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다. 오늘도 진 볶음밥이 되었다.

언제 가스레인지 불을 꺼야하나를 고민하다가 볶기를 멈추고 밥을 쳐다보았다.

10살이 조금 넘은 아이가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있다. 진 볶음밥이다.

엄마는 내가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고 먹였다는 것을 알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엄마도 그저 먹고 먹이는 일이었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았을까?

나도 내 사랑하는 아이가 집에서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고 먹이게 하는 엄마가 될까?

환풍기 소리가 시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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