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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話

쿤의 여행 / 윤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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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난, 자라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거 안 했어. 남들이 뭐라고 하든, 가능하면 어른이 되지 않고 남고 싶었다고. 그랬는데 떨어져나갔어. 저절로 말이야. 연결 부분이 점점 늘어나면서 너덜너덜해지더니,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뱃가죽 전체에 당기는 것처럼 통증이 느껴지는 거야. 심하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이상하더라고. 일어나보니, 없어졌어. 감쪽같이. 뭐가 이런가, 싶었어. 뭐가 이래? 난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내가 왜 어른이 돼야 하는 거야? 그런데 그 뒤로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몸이 쑥쑥 커지기 시작했어. 난 정말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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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쿤을 물려줄 수는 없었다. 나는 쿤을 업은 채 신음을 흘리며 열람실로 갔다. 검색용 컴퓨터에 '쿤'을 입력했다. 수없이 많은 밀란 쿤데라 연구서들 사이에서 제목을 찾아냈다. <쿤을 없애는 법>. 나는 자연과학 서고로 가서 책을 찾아 삐냈다. 쿤이 두 팔로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나는 쿤의 팔을 잡아뜯으며 간신히 책을 펼쳤다. 쿤을 영원히 없애는 법 : 거울을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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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그날 그곳을 굴러가고 있던 쿤은, 그러니까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우무처럼 물컹거리고, 곤약처럼 미끄러운 작은 회백색 덩어리일 뿐이었다. 나는 내 앞을 지나가던 쿤을 붙잡아 두 손으로 움켜 쥐었다. 순간, 쿤 표면에 주르르 흐를 만큼의 물기가 배어나왔다. 당황하는 듯한 느낌이 손가락을 타고 전해져왔다. 잡히지 않은 부분이 아래위로 쫙, 늘어났다. 그러더니 도망치려고 있는 힘을 다해 울컥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손가락에 힘을 넣었다.

그 날 나와 닿은 그 순간부터 쿤은 내 몸에 붙어살게 되었다. 내 겉모습을 취하고, 내 명령에 복종하며, 내 역사를 공유하고, 내 대신 추해지면서. 그러니 실은 쿤이 나를 빨아먹은 게 아니라, 내가 쿤을 취하고 사용하고 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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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옆으로 눕게 했다. 내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그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제대로 가눠지지 않는 그의 여린 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자신의 쿤에 눌려 숨을 헐떡이는 조그만 그를, 나는 이제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쿤을 보낸 내가 어른이 되겠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또 다른 쿤들을 계속 찾아다녔듯, 그 역시 무언가를 견딜 수 없어 끝없이 쿤을 찾아다니는 불완전한 어린애에 불과했던 것이다.

 

쿤을 뜯어냈다. 길고 힘든 수술이었다고 의사는 말했다.

아버지의 쿤은 그가 자랄 모습으로 자랐고, 이제 그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 나는 그의 쿤을 화장해 바다에 뿌리고, 어린 그의 몸은 수습해 양지바른 곳이 묻었다.

다시 봄이 되었을 때 나는 남편과 아이와 함게 그곳을 찾았다. 새로 싹이 올라오는 무덤 언저리를 밟았을 때, 문득 궁금해졌다. 쿤을 만나지 않고 살았다면, 우리의 빈 곳을 그대로 비워둔 채 살았다면 우리는 서로를 만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평생 한 번이라도 집을 나서볼 수나 있었을까.

 나는 무덤 앞에 잠깐 서 있다가, 흙 속에서 벌레와 진물과 어둠을 생생하게 견디고 있을 내 어린 아버지에게 말해주었다.

 괜찮아요, 자라지 않아도.

딸이 내 손에 제 손가락을 끼워넣었다. 딸의 손은 따뜻했고, 내 손에 비해 아직 조그맸다. 그리고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다.

 남편과 딸의 손을 잡고 열다섯 살의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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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서영은은

"우리가 기생하며, 의존하고 있는 '나' 아닌 모든 것의 통칭,

몸의 일부가 된 물컹한 혹이기도 한 것이 '쿤'" 이라고 했다.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사람들은 몇 개의 얼굴로 살아간다. 크거나 작게 자신의 모습을 위장하고 그 위장된 모습에 가려져 평생 동안 본래의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작가는 이러한 가면의 생을 '쿤'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므로 일상의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위장한 '쿤'으로 살아간다. 쿤을 제거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본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고 했다.

 

윤이형이 명명한 의존적 자아의 다른 이름인 '쿤'은 마흔 살이며

거기서 떨어져 나온 것인지, 뜯겨진 것인지 모를 나는 열다섯 살이다.

그래서 한동안 먹먹했다. 앞으로 이 소설을 여러 번 읽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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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이다.

 

대상 수상작은 편혜영의 <몬순>이다.

영화 <다우트>에서 에이미 아담스와 메릴 스트립이 싸우는 장면이 생각났다.

불안한 얼굴로 퍼붓던 에이미 아담스의 절규 끝에 터져버리는 전등.

불안은 확신하고픈 것이 존재하는 사람에게만 있다.

원장 수녀가 그랬고, 거대한 바람의 방향이 언제 바뀌는지에 대해 모르는 우리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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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왜 그 의존적 자아를 '쿤'이라 불렀을까.

밀란 쿤데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