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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話

페미니즘의 도전 / 정희진

거의 모든 인간의 고통은 '말' 때문이다. 즉, 지배 규범을 내면화할 때 발생한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주장하고 싶은 이야기는, 남성의 관점으로부터 여성, '나'를 정의하지 말고, 서구(이성애자, 백인, 비장애인, 부자, 서울 사람..)와의 관계로부터 '우리'를 정의하지 말자는 것이다. 나는 나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다르게 그래서 즐겁게 살며, 자신을 다양한 존재로 개방해 나가기를 원한다... 나는 페미니즘이 우리 자신을 나날이 새롭게 만드는 매력적인 참고 문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_ 머리 말 中

 

 

얼마 전 나는 한 신문사에서 주최한 '남성과 가족'이라는 주제의 좌담회에서, 평소 나와 절친하며 여성운동에 우호적이라고 알려진 어느 남성으로부터 '충고'를 받았다. 그는 "페미니즘은 자기 주장을 하기 전에, 남자는 불쌍하다. 남자도 피해자다..이렇게 남자들을 달래고 위로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라는 요지의 주장을 했다. 이런 말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여성주의자들이 흔히 듣는 말일 것이다. ..... '마초'냐 아니냐에에 상관없이, 이들은 내가 먼저 칭찬과 격려로 자신을 보살펴주기를 바란다. 이른바 '지혜로운 여자'를 요구하는 것이다. 내가 그들을 '위로'하기 전에는, 나의 이야기가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주체는 타자의 인질"이라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을 상기하면서 흠칫 놀라게 된다. 남성은 여성에게 의존한다. 타자(여성) 없이 주체(남성)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_P.51

 

대부분의 가정폭력은 가해 남편이, 아내가 어머니/며느리로서 성역할 규범을 어겼다고 판단했을 때 발생한다. 성역할 불이행이 '맞을 짓'이 된다는 사실은, 이 노동이 여성 자신을 위한 일이 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몇 해 전 경제 능력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 아내가 돈을 벌러 나간 사이 아버지가 우는 아들을 살해한 일이 발생했다. 사건 그 자체로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이에 대한 당시 여론이 아버지의 '육아 스트레스'에 대한 동경과 아이를 돌보지 않은 어머니의 비정함에 대한 비난에 집중했다는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우리 사회가 그 여성에서 요구한 것은, 돈은 벌되 갓난아이를 업고 직장에 나가서 남편을 편안하게 해주라는 것이었으리라. _p.68

 

2004년 2월에 발생한 탤런트 이승연 씨의 '위안부 누드' 사건에 대한 가장 보수적이고 위험한 견해는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나?" , " 민족의 아픔을 상업적으로 이용했다.","황당하다"는 식으로 기획사와 해당 연예인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안부 누드'는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아니라, 한국 남성과 여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민족 문제로 보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은폐하는 것이다... '위안부 누드'는 황당한 사건이 아니라, 남성의 이윤과 쾌락을 보장하려는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위안부' 누드여서 문제인가, 위안부 '누드'여서 문제인가? 누드의 소재가 위안부였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라면, 일반 누드와 포르노그래피는 문제가 없다는 것일까.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와 폭력이 이처럼 성애화 될 때, 남성 권력은 보이지 않게 되고 여성 억압은 생물학적 질서로 간주되어 비정치화된다.

 이 사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인간의 감성과 사랑이 평등과 정의가 아니라 지배와 폭력을 에로틱하게 느끼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평등을 에로틱한 것으로 느낀다면, '위안부 누드'는 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비난받지 않는 일반 누드'와 '비난받은 위안부 누드'는 차이가 없으며, 포르노그래피 산업의 연속선상에 있다. 만약, '일반 누드는 되지만 위안부 누드는 안 된다"라는 사고방식이 그 차이를 발생시켰다면, 이는 문제의 원인을 은폐하려는 남성 사회 전략이라고 생각한다._'위안부 누드'의 지배 에로티시즘 정치학 中

 

현재 반성폭력 여성운동은 (기존의 언어에서 본다면) 여러 가지 모순에 직면해 있다. 성적 자기결정권 주장과 여성은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았다는 주장을 동시에 해야 하고, 성폭력은 섹스가 아니라 폭력인데 동시에 그것은 성적인 폭력이라고 설득해야 한다. "죽어도 잊을 수 없는 죽음과 같은" 성폭력의 극심한 피해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피해 여성은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고 주장해야 한다. _.p.150

 

서른이 된다는 것은 '젊은이' 영역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태까지는 젊음의 기득권이 당연한 것이므로 이십대라는 기득권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보다 더 살벌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품위 있게 사느냐, 초라하게 사느냐의 문제였다. '진정성'의 힘만으로는 살아가는 일이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싸울 대상이 없어졌지만 내놓을 목숨 또한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 나이 듦에 대한 고민 과정을 돌이켜보면서 나는 남성들이 여성 문제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 역시 20대에는 나이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자기 경험을 뛰어넘어 타인, 더구나 타자의 억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한국 사회는 계엄령이 필요없는 사회다. 사회 구성원들의 상상력, 용기, 소망으느 나이에 따라 철저히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대단히 자발적으로 나이 듦에 대한 지배 이데올로기 - 누가 지배하는지 모르는- 를 수용하고 있으며 나이 든 자, 나이 든 여성을 혐오한다. 나이에 따라 삶의 가능성이 체계적으로 억압된 사회, 이것은 고도로 조직화된 조용한 폭력이다. _나이 듦, 늙음 그리고 성별 中

 

 

남성의 언어, 남성적 사고의 위험성과 폭력성을 지적하는 글은

폭력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남성'들을 타자화하는 기회가 아니라

(내 생물학적 조건인 '여성성'이 아무 쓸모 없어지는) 내 안의 '남성성'을 확인시켜주는 기회였다.

 

기지촌 여성들이 무언가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방문객들은 "어휴,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이렇게 밝게 사시니까, 정말 보기 좋네요"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 기막힌 타자화에 어이없어하며 깔깔거리며 웃었다. _P.215

 

(나도 그 방문객도)

수 많은 존재를 타자화하며 나는 안전지대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 약한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안전지대가 없어진다. 나도 약자라는 것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나를 새롭게 만드는 매력적인 참고문헌'이 많아진다는 것은

안전지대로 착각하던 수많은 타자화를 버리는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