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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 花

[Three L] 열품타

"나 열품타 시작했어"

"열품타가 뭐야? ...열나게 해도 품삯도 안 나오고 현타 온다?"

 

우리 고 과장님은 작년 통계 기준으로 70만 명에 달하는 취업준비생들의 세계를 모른다.

너도 한 때 출첵 스터디, 밥터디, NCS스터디해보지 않았냐며

언컨택트 시대 청춘들의 자화상을 읊어주려다가 말았다.

나는 아직도 공부를 하고 있구나, 라는 (그야말로) 현타가 왔기 때문이고

나 역시 많은 동기들이 열품타 열풍을 열나게 이야기할 때 내심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타 타이머 어플은 많았지만

가장 많이들 쓴다는 '열품타'를 시작하게 된 건

내년 곰식이의 발령지에 따라 타지에서 혼자 공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혼자' 공부해야 하는 것을 내심 무서워하고 있었다.

 가장 사람이 많이 모여있는 곳으로 나를 들이밀어야 한다.

 

스콧 터로의 <One L>에서 로스쿨은

'지구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나뒹구는 것 같'고,

'대부분 멍한 정신'이며 '시도 때도 없이 두려움과 우울, 형용할 수 없는 욕구에 나가떨어지고'

'기운 돋는 말을 해도, 비꼬는 말을 해도 상황은 더 악화되는 곳'이라고 했다.

또, '로스쿨 학생들이 대체로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 데다 우수한 성적에 따라 장래의 좋은 일자리가 결정된다는 심리적 경쟁이 심해서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성적이 강조돼'고 '긴장과 경쟁, 불확실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며 '그런 경험이 아찔할 정도로 때로는 두렵고 언제나 격렬한 것이었음을 확실히 말할 수 있다'라고 했다 

터로가 '이것은 소설이 아니며' '하버드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매년 법학 공부를 시작하는 학생들의 경험과 별로 다르지 않기에'

공감하고 흥미 있어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머리말에서 말했다.

그 머리말을 읽는 45년 후 대한민국의 나도 머리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바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사실 우리나라의 로스쿨은 여전히 유효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기사랑' 정신 덕분에

격정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고 비교적 안전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말이 길었지만,

아무튼 나는 동기들 없이 공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10기 동기들과 함께 할 수 없다면 나는 피상적 동기들을 만들어야 한다.

동기(peer)가 동기(motive)라고 10여 년 전 또 다른 대학원 입학식 때 원장님이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니 그분도 하버드를 졸업하셨다.

 

또 쓸데없는 말이 길었지만

그래서 나는 열품타 그룹스터디에 참여했다.

로스쿨생방에는 2020.10.14. 현재 1,104명이 참여하고 있고 저녁 7시경 493명이 공부 중이다.

수백 개의 그룹스터디 방에는 각자 정한 목표랑에 따라 서로를 의식당하려는 의도로 모여있다.

나는 강퇴 조건이 있는 방에 들어갔다. 강하게 의식하며 퇴근하겠다는 의지로.

 

문득, 내가 20대 때, 지금보다 더 뜨겁게 공부했던 때, 그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의 에너지로 살았을 때,

그러니까 내가 나를 괴롭히며 균형을 못 잡았던 그때, 1차 시험장에 가져갈 쪽지를 쓰던 친구가 생각났다.

" 감독관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시험을 치는 수험생입니다.

이 시험은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집중을 해야 하는 시험으로, 예상치 못한 작은 불확실성이 큰 영향을 주는 시험입니다. 그래서 부탁드리건대, 감독하시는 중간에 불필요한 걸음걸이, 작은 기침 소리 등을 주의해주십사 쪽지 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내가 둥글둥글 살아가며 칭찬받을 때마다 그 친구를 생각한다.

그녀의 까칠함과 간절함과 뜨거움을 생각한다.

나는 언제 뜨거웠나, 언제 우주의 기운을 모으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나.

 

박 사무관, 그녀도 아마 열품타를 모를 것이다.

"열품타가 뭐야? 열심히 품으면 타인 좋은 일만 시킨다?"

*

나는 또 현타가 온다.

곱씹기엔 열품타 하루 할당량이 많다.

그리고 이제 균형점을 찾을 줄 아는 나이가 되었으므로,

지금 내가 가진 것이 감사하게도 정말 많다는 것을 잊지않으려 하므로,  

잘 부탁드립니다. 열정을 품은 타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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