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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 花

[Three L]

코로나19와 함께 로스쿨에서 5번째 학기를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서 시험을 보고 답안지를 스캔해 교수님께 메일로 보냈고

교수님들은 출력 후 채점하시고 다시 스캔해 메일로 보내주셨다.

나는 모든 문제를 '어렴풋이' 풀었다. 그 와중에 책을 보며 쓰기도 했다.

샘플 답안지로 뽑혀 학생들에게 보이기도 했다. 글씨가 바르고 무난하게 잘 쓴 답이라고들 하셨다.

나는 후자에 방점을 찍고 뿌듯할 때도 있었지만, 사실 방점은 전자에 있었다.

그것은 말그대로 샘플로써의 가치가 있었을 뿐 내 실력에는 아무런 피드백이 되지 못했다.

내가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부작용만 쌓여갔다.

말하기 부끄러운 착각이었다. 나는 아무런 실력 향상 없이 한 학기를 보냈다.

수 년동안 여러 학생들을 상담해보신 교수님은 나의 상태를 잘 알고 계셨다.

두려워하고 있다. 내가 잘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어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고 빙빙 돈다.

언제부터 잘못된 것인지 본인은 알 것이다.

지금이라도 긴 안목으로 공부하면 좋겠지만 무작정 반복하고 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전자를 택했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다.

다들 똑같은 상태라고, 후회할 거라고, 욕 한 바가지 하실 것 같은 교수님을 찾아가라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가장 큰 이유는 이 알 수 없는 무기력감이다.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에 책상에 앉아 점심도 안 먹고 몰입한다.

언제부턴가 오전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하루가 엉망이 된다.

나는 지금 다시 기본서를 읽고 천천히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2시간 뒤에 시험이고 또 2시간 뒤에 강평 수업이 있고 내일은 봐야 할 기록이 있다. 변론요지서는 써보고 수업에 들어가야지, 메모만 해보고 들어가야지, 기록만이라도 읽고 가야지, 나는 갑자기 목이 졸리는 것 같아 5분이면 볼 공소장도 읽지 못하고 하루를 보낸다.    

 구멍만 막으며 지내왔다.

나와 살아와본 경험치는 나에게 말해준다. 이렇게 하면 안 돼 너.

곰식이는 내 마음을 잘 아는지, 꼭 1년만 휴학해야 한다는 부담 갖지 말라고 한다.

책임감 없는 일일까 봐 걱정하지 말라고. 이건 오히려 더 책임감 있는 행동이라고. 고마워 내 남편.

 

한 학기를 남겨놓고 휴학한 자의 길지 않은 변명이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다.

1. 휴학한 것을 후회하지 않게 열심히 공부하자.

2. 로스쿨 입학 전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지 말자.

3. 어떤 변호사가 되고 싶은지 생각하자.

4. 위 3가지를 지키지 못하더라도 잊지 말자. 자격증은 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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