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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아

잘 모르겠지만 네가 필요해

<건축학개론>과 <스틸>에서 보이는 욕망의 관계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140&aid=0000023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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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왜 승민에게 “너와 살고 싶다. 그러니 우리가 함께 살 집을 지어다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않는/말할 수 없는 것일까. 라캉이라면 서연을 전형적인 ‘히스테리자’라고 불렀을 것이다. 라캉은 히스테리자를 “자신의 욕망을 만족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려는 주체”로 정의한 바 있다. 영화 전체를 통해 서연은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바꾸는 식의 게임을 벌인다. 병든 아버지를 빌려 승민에게 접근하고 승민을 빌려 아버지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서연의 진짜 욕망은 타인의 욕망으로 은폐돼 있다. 은폐돼 있는 욕망이 어찌 만족을 알겠는가.
자신이 뭘 욕망하는지를 모르(는 척 하)면서 오직 타인을 통해 그것을 알아내고자 하는 서연 같은 여자, 참 피곤하다. 그런데 남자들은 늘 그런 여자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남자 역시 여자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기를 원하기 때문일 터. 현실적인 관점에서라면 늙은 아내를 끝까지 책임지는 크레이그 같은 성숙한 남자가 최고겠지만 우리는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승민 같은 남자나 자기 욕망을 모르면서도 뻔뻔한 서연 같은 여자에게 더 끌린다. 우리의 내면은 자기 안의 자기, 그 안에 또 자기가 들어 있는 러시아 인형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은 언제 틈입해 들어왔는지 모를 타자의 욕망들로 어지럽다. 그래서 늘 흥미롭다. 인간이라는 이 작은 지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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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김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