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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話

남한산성 / 김훈



최명길은 가죽신에 발감개를 하고 눈 덮인 산길을 내려갔다. 길섶에 청병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 해가 성벽 위로 올라가며 거여, 마천의 넓은 들이 밝았다. 비스듬한 햇살이 멀리 닿아서 들이 끝나는 가장자리가 빛났고, 들판 너머에서 크게 휘도는 강은 옥빛으로 얼어 있었다. 산야는 처음 빚어지고 처음 빛을 받는 강과 들처럼 깨어나고 있었다. 최명길은 차가운 공기를 몸 깊숙이 들이마셨다. 해가 떠올라 들을 깨우는 힘과 강이 얼고 또 녹아서 흘러가는 힘으로 성문을 열고 나올 수는 없을 터이지만, 삶의 길은 해 뜨고 물 흐르는 성 밖에, 강 너머에, 적들이 차지한 땅 위에 있을 것이다. 청병의 매복 진지 사이로 난 산길을 최명길은 걸어 내려갔다._P.161



 이 날 아침 이후, 새벽 눈 길을 밟으며 용골대를 만나 화친을 타진해보고 돌아온 이후,
시종잡배에서부터 묘당까지 '최명길을 처형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당면할 일을 당할 뿐'인 전세였을진데.....


해가 떠올라 들을 깨우는 힘과 강이 얼고 또 녹아서 흘러가는 힘으로 성문을 열고 나올 수 없고. 삶의 길은 해 뜨고 물 흐르는 성 밖에, 강 너머에, 적들이 차지한 땅 위에 있다.

가평에서 청량리로 오는 기차 안에서,
행정고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개방형임용으로 변경한다는 뉴스기사를 스크랩하신
아빠의 메일을 받았다.
 
어찌 오랑캐와 화친을 말하느냐고 절개와 의를 논하는 김상헌에게
상을 내리시더라도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 했던,
삶의 길은 강 너머 적들에게 있다고 하기 싫은 말을 뱉고
혼자 무거운 짐을 지고 새벽 눈길을 밟는 최명길이 눈에 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