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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언젠가 당신들께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아니, 저는 매순간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포도주 한 잔 앞에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싶기도 했고, 차마 꺼내지못했던 돌직구를 날려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당신께 수많은 편지를 써서 서랍 깊숙이 넣어놓고 시간이 되면 고쳐써서 때가 되면 부치려했던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애초에 '시간'이라는건 있을 턱이 없고 '때'라는 건 영영 오지 않는다는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흐르는 시간과 떠다니는 때를 일부러 잡아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우선, 저는 요 몇 달 아주 행복했습니다. 진심으로 행복했습니다.
혹시 무자비한 탄원 같은 편지 일거라 생각하셨는지요, 당신도 제가 꽤 행복한 얼굴을 했던 순간들을 기억하실테니 꼭 그렇게 예상하진 않으셨겠지요.

 

오랜만에 우리가 처음 연락처를 주고받았던 문자를 봤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 끝어미들에 달린 밀도가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생각하면 참 놀라운 문장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감회가 새로웠던건 그게 고작 3월 말이었다는 것이긴 합니다만..

당신께 썼던 편지들에는 당신이 제게 해준 말들이 녹취록처럼 적혀 있습니다. 그리 성실하지 않은 녹취라 듣고싶은 것만 적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크게 적어놓은 것은 "다시 일 할 기운 생겨.." 입니다.
저는 '다시'도 좋았고 "일하다'도 좋았고 '기운'도 '생기다'도 좋았습니다. 또 다른 당신은 '세은이 때문에 한다'라고 했지만 그것은 사실 좀 민망해서 접어두었습니다.

당신이 처음 문을 열고 들어오던 날을 기억합니다. 나는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그런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왠지 그래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해두지요. 나는 누구에게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당신께 이런저런 말을 조심해달라고 부탁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도 누구에게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겠지요. 요 몇 달, 이렇게 괜찮은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고 고백하셨으니까요. 많이 편해지신 당신,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은 늘 저를 두고 '자꾸 들이받지 마라' '나 미워하지마라' 하셨지요. 웃고 넘겼지만 저는 억울합니다. 매번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참아야했고 날리고 싶은 돌직구를 뱅뱅 돌려 안겨드리느라 애써야했는데 들이받다니요, 미워하다니요.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로 "아까 그 말을 왜 못했지" 하며 이불킥 한 날이 며칠인데 저는 억울합니다.
그런데 덕분에 저는 이상한 경험도 많이 했습니다. 쉬운 게임보다 어려운 게임이 훨씬 재밌고, 나같은 사람들과 지내는 것보다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과의 부대낌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너스로 나는 흥분하면 오히려 차분히 말하는 사람이고, 막다른 길에서 새 길이 나고, 여우굴을 피하면 호랑이굴이 나타난다는 것들을 배웠습니다. '네가 부탁하면 뭘 못 들어주겠느냐' 하셨지만 아무것도 부탁하고 싶지 않네요. 말씀은 참 감사했습니다.

말이 길어졌지만 저는 행복했습니다.
이제 편지를 마칠 수 있어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