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를 생각했는데
사실은, 예수님을 믿는자들,
나같이 '성자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읽었을까..가 궁금한 책이었다.
알다시피 오늘 대개의 사람들에게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온 메시아도 유다에서 온 메시아도 아닌 '교리 속에서 온 메시아'다. (중략) 오늘 날 대게 사람들은 예수가 정말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활동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왜 죽임을 당했는지 따위는 모조리 생략한채, 그를 단지 교리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한다. 정말 예수는 단지 교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그 고단한 삶을 살았단 말인가? _ p. 25
요즘, 새벽미사가 기쁘지 않다.
다 아는(것 같은) 새벽 공기, 다 아는(것 같은) 새벽 성당, 다 아는(것같은) 새벽의 하느님.
어쩌다 이렇게 시시해(?)져 버렸는지 나도 내가 놀랍고 무서웠다.
그때의 이 물음은, 하느님이 이 무기력한 나를 보시고 한줄기 동아줄을 내려주신것 같았다.
이거라도 잡고 올라와봐라..
예수의 모든 행동은 '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끓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의 분노 역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이 자연스레 그들의 고통을 낳는 사람들과 사회체제에 대한 강렬한 분노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거나 예수에게서 배우는 일 역시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을 갖는 일에서 출발한다 _ P.38
애끊는 마음과 분노. 나의 분노를 생각하면 늘 애끊는 마음이 있었다. 나는 곰식이가 풀이 죽어 목소리에 힘이 없거나, 짠이 거울앞에 서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패션쇼를 하고 있을때 분노했다. 나의 분노는 진심이었고 진심으로 애가 끓었다. 그리고는?
나머지는 분노의 흉내였다. 무료진료를 찾아다니다가 지하철역에서 사망한 할머니에,
4대강사업으로 죽어가는 환경에, 방사성위험도를 숨기고 있는 듯한 정부에 나는 분노를 연기했다. 스믈스믈 느껴지는 씁쓸함을 분노로 포장하기에는 멋쩍다. 내가 누군가에게 너그럽다면 나는 마음이 넓은게 아니라 한번도 애끓을만큼 그를 생각해보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애끓는 마음을 연습해본다. 주일학교에서 배우던 "예수님 닮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하는거로구나!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던 애인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 비판이란 지배체제가 허용하는 범위안에서만 안전하다.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체제가 얼마간 수용할 수 있다. 사실 그런 수용은 체제 유지를 위해 유익하다. 체제가 좀더 근본적인 저항이나 위기를 맞는 상황을 미연에 막아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에 체제 자체를 부인해 버리거나 적대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체제는 개혁은 수용할 수 있어도 변혁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유대교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개선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뒤집어 다시 세우려 한다. 예수는 사회에서 배제되고 나아가 제거될 위험 속으로 발을 디딘다. _P. 56
바리사이인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그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일주일에 두번 금식까지 하면서도 먹고사는 데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나 품위 있게 살고 싶은 욕구는 바리사이인들보다 적지 않았지만 먹고사느라고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바리사이인들 앞에서 죄의식과 열등감에 젖어야 했다. 바리사이인들은 인민들의 그런 죄의식과 열등감을 기반으로 여느 인민들에게서 자신들을 '분리'하여 품위를 유지했다. 예수는 그 공공연한, 그러나 아직 한 번도 문제시되지 않은 억압의 체제에 분노한다.
_P. 59
신앙은 ' 하느님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의 종교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활동, 즉 '하느님이 진행하는 역사에 인간이 참여하는 행위' 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은 인간이 만든 종교체제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의 성실과 충성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 속에서 하느님이 벌이고 있는 역사, 즉 하느님 나라 운동에의 참여인 것이다. _P. 68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단지 그 말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 혹은 가슴으로 느끼는 것?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알아듣는게 아니다.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그 말을 이해하고 느끼는 건 물론이려니와 삶에 새겨 실천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보이는 것을 보고 들리는 것을 들으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사람은 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는다. 사람은 대게 마음의 귀, 마음의 눈을 닫고 살아간다. _P.74
그들이 예수를 따라나선 건 예수가 예언자 혹은 메시아라는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예수를 자신의 예언자상, 혹은 메시아상에 끼워 맞추려 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서 자신들이 바라는 모습이 보일 땐 환호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_ P. 76
제가 보지 못하는 것에 눈을 뜨게 하시고 듣지 못하는 귀를 열어주소서. 마음이 닫혀있다면 활짝열어 주님이 들어오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알게모르게 규정해버린 예수님이 있지 않았는지, 하느님이 있지 않았는지, 하느님 나라가 있지 않았는지 반성하면서...
이 군대 귀신 에피소드 ( 5장 1절-20절)에는 복음서를 통틀어 가장 또렷한 정치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대부대'는 그리스어 '레기온'을 옮긴 것인데 이 말은 '로마의 보병 군단'을 뜻한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군을 통칭해서 '레기온'이라 불렀다. 그리고 또 그들을 '돼지'에 비유하곤 했다. '내려달라'는 그리스어 '오르메센'으로 로마군의 돌격 명령이다. 정리하면, 예수가 돼지 같은 로마군들에게 돌격명령을 내려 모조리 물에 빠져 죽게 했다느 ㄴ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른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 사람들을 추격하던 파라오의 군대를 하느님이 홍해에서 모조리 물에 빠져 죽게 했다는 이야기의 익살스러운 은유이긱도 하다. 로마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킬킬 웃으며 통쾌해할 이야기인 것이다. _ P. 85
처음듣는 해석에 감격할뻔 했다. 그리고 누구에게든 이렇게 재밌는걸 알아냈다고 알은척 좀 하려다 말았다. 성격해석이 다양한걸 알고 있지만 성경을 지식유희를 위해 읽는 것에 아직 경계심이 들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의 뜻, 이면의 의미, 저자의 의도 따위가 성경의 본질은 아니잖나.
예수의 정치성에 대한 어이없을 만큼 어리석은 해석들은 생각보다 많다. 예수의 활동에 정치적 변혁이 빠져 있다고 말하거나, 정치를 배제한 어떤 것 (영원한 진리, 사랑 등으로 표현되는) 을 목표로 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주요한 예이다. 예수에게 정치적인 해방은 굳이 강조할 이유조차 없는, 혹은 배제하려 해도 베제할 도리가 없는 매우 기초적이고 당연한 문제였다. 예수는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 죄인, 여성, 아이들이 사람 취급 받는 세상을 구름 위에, 관념 속에 건설하려 한 게 아니다. 그 변화는 원하든 원치 않든 당연히 정치적 갈등과 불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예수의 변혁은 당연히 정치적인 변혁을 포함했다. 그것을 궁극의 목표로 하지 않았을 뿐. _P.87
현실을 들여다 보면 사적인 친소관계를 넘어선, 혹은 내가 속한 그룹이나 학파를 넘어선 정당한 논쟁과 비판은 실제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그런 비판과 논쟁들이 '나'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그룹이나 학파는 실은 '나'를 구현하기 위한 껍데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걸 넘어설 수 있는건 예수가 '나'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예수에겐 내가 아니라 하느님, 내가 아니라 인민, 그리고 내 일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민이 만나는 일만이 중요했다. _P. 91
예수 당시 바리사이인들이 자신들이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듯, 오늘 바리사이인들은 자신들이 바리사이인인 줄 모른다. 그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며 안정된, 그러나 거부감이 들 만큼은 아닌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며 상당한 사회의식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이다. 그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과 짐짓 긴장과 갈등으르 벌이며, 늘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야만 하는 대다수 인민들과는 달리 시민으로서 양식을 충분히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냉소한다. 인민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을 혐오하지만 양식과 윤리로 무장한 그들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그들,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으느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라는 그들의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_P.119
꿈꾸는 것을 중단하고, 현실적인 타협안을 찾는 세상을 분노하시고 용서하시는 예수님.
2000년 전 현실위에 세우시려던 하느님나라를 오늘 날의 나는 구름 위에 지으려고 하지 않았는지.. 메시아로서 핍박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실 줄 알았더니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당신. 당신의 축복을 바란다면서 사실은 내가 정한 축복을 기다렸던것은 아닌지..
예수의 부활은 역사 속에 실제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예수가 부활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가장 극적인 일은 예수가 잡히자 뿔뿔히 흩어졌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 "예수가 부활했다!" 외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를 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달라진 모습 사이에 예수의 부활사건이 있었다
_P.261
마지막 장, 예수가 부활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를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눈물이 펑펑 나서 엉엉 울었다.
머리말에서 밝힌 설명을 이해못할 건 아니지만,
애끓어 분노하는 - 정치적 - 혁명가 - 열렬히 환호받고 - 철저히 경계받은 - 지도자가
존댓말로 ' 합니까. 하십시오. " 하는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내일모레가 부활절이다.
지난 주에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고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겼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내일 모레, 부활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아, 아직 먹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