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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을 시작하며

 

 

올 해 사순절은 평소보다 조금 이르다.

사순절은 부활대축일 전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기 위한 40일을 의미하는데

부활대축일은 닛산달이 지난 첫 보름 후 주일로 정한다.

닛산달은  히브리 지방의 춘분과도 같은 절기로 그 날짜가 현 양력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므로

매 해 닛산달을 계산해 보름이 지난 첫 주일인 부활대축일을 알아맞추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고 한)다.

 

천주교주교회의 의장단이 지난해 북한을 방문했다.

북한 사목의 중요성을 상기할 때 괄목할만한 방문이었다.

의장단이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4대 축일 중 하나인 부활절을 기점으로.."로 시작하는 계획을 발표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기자가 "내년 부활절이 언제인가요?" 라고 물었다.

주교님은 "4월쯤 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올 해 부활절은 3월 27일이고 심심치 않게 여러 오보를 만들어냈다.

이렇듯 부활절 날짜는 헷갈린다.

 

가톨릭 교회에서  전례력은 매우 중요하다.

방송국에 있을 때는 더욱 그랬다. 내년 부활절이 언제인지 알아보려면 어디에 물어야하는지 궁금해 했더니 어느 선배는 가톨릭기도서 맨 뒷장에 2026년까지의 부활절 날짜가 나와 있노라고 알려주었다.

그 선배는 자신만이 아는 꿀팁을 특별히 가르쳐주는 듯 했으나 '노하우'라는게 대게 이렇다. 'know- where'이 가진 경험치에서 나오기 마련인 그 작은 차이에 겸손해야한다.

아무튼 매우 중요한 가톨릭의 전례력은 부활절 날짜만 알면 그 전 40일은 사순절이고

그 후 며칠은 부활축제기간이고 그 후 주일은 다시 연중이 시작되며

성탄절 전 4주일을 역산해서 대림시기를 지내고 나머지는 연중시기를 지내며.. 등등

1년 달력을 완성해낼 수 있다.

 

 

올 해 부활절은 평소보다 조금 이르다.

이렇게 들쑥날쑥한 부활절 날짜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늘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은 연초 분위기에 휩쓸려

'밤 도련님 문지방 넘듯' 넘어가고 만다.

올 해도 어김없이 설 연휴라는 핑계로 재의 예식도 제대로 못하고 사순절을 시작했는데

뜻밖의 초대와 뜻깊은 미사로 사순절 새벽을 맞았다.

 

그야말로 '엊그제' 사제서품을 받으신 신부님의 배려로

수유동에 있는 봉쇄 수녀원에서 새벽미사를 드렸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에 차가운 자동차 시트에 앉는 기분은 묘하게 설렌다.

봉쇄 수녀원이라 영화에서 보던 중세풍의 성전이 있지 않을까 (철없이) 기대했는데 평범했다.

그러나 제대는 8각형으로  한 쪽에서는 일반신자들이,

벽을 가운데 두고 다른 한 쪽에서는 수녀님들이 예식에 참여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였다.

저 벽 너머에 3시 반에 하루를 시작해 기도하시는 수녀님들이 계신다.

새 사제의 긴장한 강론에 수녀님들의 보이지 않는 웃음소리가 맑다.

 

수녀원에서는 감사하게도 '신부님 일행'이라며 우리를 아침 식사에도 초대해 주셨다.

신부님께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다.

성물방 옆의 소박한 손님 식당이다.

일제시대 미국 선교사들의 집에서 볼 수 있었던 디자인의 찬장과 식탁보가 곱게 차려진 나무 식탁.

그리고 필립스 토스트기로 갓 구운 빵과 따뜻한 스프,

설 연휴 다음날이라  우유가 없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라며 무척 신나게 찾아주신 서울우유가

묘하게 조화롭게 공존하는 곳이었다.

다시 한번 '신부님 고마워요' 인사했더니 '나도 처음 와봐' 하셨다.

 

서둘러 출근하는 바람에

식사 후 수녀님들과 만나 또 한번 꺄르르 웃음을 들었다는 곰식이의 이야기에 배가 아팠다.

곰식이도 여러 분들께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다이어리는 양력을 기준으로 바꾸면서

새해 다짐은 어쩐지 음력을 기준으로 세운다.

새해가 밝았으니, 사순이 시작됐으니, 연휴 끝 첫 출근을 했으니,

연신 감사하는 일들을 많이 만들어보겠다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