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시창-대한민국은 청춘을 위로할 자격이 없다
현시창- 대한민국은 청춘을 위로할 자격이 없다(임지선/알마)
#. 죽음, 이것은 리얼상황.
조지오웰이 쓴「위건부두로 가는 길」에 이런 글이 있다.
기차가 지나갈 때 그녀가 올려다보는 바람에 나는 지척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둥글고 창백한 그녀의 얼굴은 슬럼가의 젊은 여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유산과 고역 때문에 스물다섯인데도 마흔은 돼 보이도록 지쳐있었다. 그리고 내가 본 그 순간 동안, 내가 익히 본 적이 없는 어둡고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나는 "우리가 느끼는 것하고 똑같이 그들이 느끼는 건 아니다"라고 한다면 그리고 슬럼에서 자란 사람들은 슬럼밖에 상상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건 우리의 오산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때 내가 그녀의 얼굴에서 본 것은 까닭 모르고 당하는 어느 짐승의 무지한 수난이 아니었다._P. 28
한겨레 기자의 취재일기같은 이 책의 에피소드들은 조지오웰이 말한 저 위의 깨달음을 늘 자각하고 읽어야 하는 일들이다. 그만큼 잊어버리기 쉬운 마음가짐이다. 어느 누구도 1600도의 용광로가 뜨겁지 않거나 코를 찌르는 화학약품 냄새가 익숙한 것은 아니다.
2층 높이의 전기로 뚜껑 주변에 있는 스프레이 보수작업 장소에는 별다른 안전장치가 없다. 전기로로 접근을 막기 위해 허술한 쇠사슬이 걸려 있을 뿐이다. 뚜껑 주변의 이물질이 잘 제거되지 않으면 한쪽 발을 들어 쇠사슬을 넘어간 뒤 팔을 뻗치기 일쑤다. 이때 전기로의 열을 우습게 봐서는 안된다. 섭씨 1600도의 쇳물은 어떤 뜨거움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열에 노출되면 누구라도 순식간에 정신을 잃게 된다. 작업복은 말 그대로 작업복, 섭씨 1600도의 후끈한 열기에서 노동자들을 지켜주는 것은 아니다. _P.28
유미는 기흥공장 3라인에서 디퓨전및 세척공정을 담당했다. 이름은 그럴싸하지만 이 공정은 일명 '퐁당퐁당 공정'이라 불린다. 손으로 반도체 웨이퍼를 약품에 넣었다 뺐다 하는 작업이다. 디퓨전 공정은 불산, 이온화수, 과산화수소, 황산암모늄 등 화학물질이 혼합된 액체에 웨이퍼를 수작업으로 담갔다 뺐다 반복해서 웨이퍼에 입혀져 있는 막질을 세척하는 작업이다. 기계 한 대에 두명이 붙어 앉아서 하루 종일 퐁당퐁당 손을 놀린다. 유미는 하얀 방진복을 입고 얇은 천으로 된 마스크에 고글 하나만 쓰고 이 일을 했다. 유미를 보호하기 위한 장비가 아니었다. 침이라도 튈까, 웨이퍼를 보호하기 위한 장비들이었다._P.44
# 무기력
요즘은 사건기사를 읽을 때마다 전에 없던 '경이로움'을 느낀다. 기자들은 어쩜 이렇게 사건을 일목요연하고 단순하게 쓸까. 흔히'야마있게 쓴다' 하는 기자들의 그 능력이 놀라웁다. 취재현장에서 알게된 수많은 정보들 중에 이 사건의 맥락과 맞닿아 있는 정보를 선별하는 능력도 놀랍지만 나머지 정보들을 과감히 버릴 줄 아는 능력 또한 대단하다.
이 능력이 발휘되는 가장 명쾌한 순간은 바로 취재원을 인터뷰할 때 일것이다. 언론담당 직원을 두는 기관을 인터뷰할때를 제외하고 일반시민들의 의견을 묻거나 사건 당사자의 인터뷰를 할때 그들이 일목요연하고 단순하게 대답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특히 자식을 잃은 부모, 오빠를 잃은 동생, 꿈이 없는 청소년, 학대받은 미혼모, 갈 곳없는 성매매근로자, 그네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군더더기 없는 한 문장으로 완성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새삼 무거운 펜의 가벼움, 가벼운 펜의 묵직함이 느껴진다.
너무나도 에쁘게 생긴 수진이는 방글방글 웃는 얼굴 뒤로 상처를 숨겼다. 학교가 끝나고 현관문을 열면 매일같이 엄마나 언니에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아빠는 오늘 어때?'라고 묻는다. '괜찮아'라는 답을 듣고서야 큰 목소리로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며 집에 들어선다. 서진씨 엄마는 '거짓으로 밝은 척 하는 막내를 보며 모두 마음의 병이 들어있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_p93
집 밖에 나오니 냉혹하고 거친 세상이다.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 나약한 네 여자가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크다. 하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 5년만에 공부 감옥을 탈출한 서진 씨는 이제 간신히 숨이라도 쉴 수 있게 됐다. 아빠는 홀로 그 집에서 미쳐가겠지, 서진 씨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앞으로 아빠없이 살아갈 인생을 이야기하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5년만에 바깥 공기를 마신 서진씨는 길게 울고도 밝게 웃었다._p94
# 제도
어머니가 버는 돈 100만원에 영미씨가 받는 근로장학금 54만원을 더하면 당시 4인 가족 최저생계비인 132만6609원을 초과하는 154만원이 된다. 이렇게 되면 영미씨의 가족은 기초생활보장수급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근로장학금은 교과부 예산으로 운영된다. 2009년 당시에는 전문대에 270억원 4년제 대학에 930억원을 편성했다. 여기에 각 대학이 교과부 배정 예산의 25퍼센트를 대응 투입한다. 그런데 그 전해 말 기초생활보장수급제도 담당 부서인 보건복지부가 교과부에 공문을 보냈다. '근로장학금이 가계소득으로 잡혀 수급권을 박탕당하는 사례가 있다는 민원이 있으니, 근로장학금이 근로소득인지 여부를 국세청에 확인해보라'는 내용이었다. _p.117
미숙이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는 '제도'때문이다. 현행법상 '한부모 가족'으로 지원받기 위해서는 편부모 아래 미성년 자녀가 있어야한다. 미숙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가족 중에 더이상 미성년 자녀가 없다. 미숙이의 어머니는 벌써부터 1년 뒤를 걱정하느라 밤잠을 설친다_p.111
장애인연금을 받아오던 분이 갑자기 수급해지가 된 사례를 취재한 적이 있는데 (대부분 그렇듯) 담당 공무원들은 절대 법과 제도에 어긋나는 처리는 하지 않는다. 시청의 담당자는 수급자와 배우자의 소득이 연금수급자 기준치 이상이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본인의 암 수술을 앞두고 자녀들이 십시일반 수술비를 모아 수급자 명의의 통장에 넣어준 것이 소득으로 집계된 것이었다. 이 돈은 고스란히 암 수술비로 쓰일 것이며 비용처리 후 시청에 소명하면 다시 장애연금을 받을 수 있는 경우였다. 그러나 취재 전까지 친절히 '소명하시면 됩니다'라고 말해주는 이는 없었다.
# 유머가 필요하다.
'꿈을 가져라' '할 수 있다'고 파이팅을 외치는 말보다 '분노하라''짱돌을 들어라'고 말하는 책은 인기가 없다. 묵직한 현실에서 굳이 먹먹한 이야기를 더 얹어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적엔 재난영화가 재밌었는데 언제부턴가 갇히고 넘어지고 도망치는 재난영화 보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래서 이런 기획의 책에 삽입된 일러스트는 꼭 유머러스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대출사기단에 걸려 가짜 결혼한 청춘> 꼭지에 나온 이 장면 처럼.
(바른생활 교과서 버전
: 단정한 옷을 입은 철수와 영희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철수 : 영희야, 돈 좀 있니?
영희 : 아니, 대출 받을까?